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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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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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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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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7대
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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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하산 이븐 알리무아위야 1세야지드 1세무아위야 2세
제9대
우마이야 왕조
제10대
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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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12대
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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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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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15대
우마이야 왕조
제16대
우마이야 왕조
우마르 2세야지드 2세히샴왈리드 2세
제17대
우마이야 왕조
제18대
우마이야 왕조
제19대
우마이야 왕조
제20대
아바스 왕조
야지드 3세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마르완 2세아부 알 아바스
제21대
아바스 왕조
제22대
아바스 왕조
제23대
아바스 왕조
제24대
아바스 왕조
알 만수르알 마흐디알 하디하룬 알 라시드
제25대
아바스 왕조
제26대
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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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28대
아바스 왕조
알 아민알 마문알 무타심알 와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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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아바스 왕조
제5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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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라시드알 묵타피알 무스탄지드알 무스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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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54대
아바스 왕조
제55대
아바스 왕조
제56대
아바스 왕조
알 나시르알 자히르알 무스탄시르 1세알 무스타심
제57대
아바스 왕조
제58대
아바스 왕조
제59대
아바스 왕조
제60대
아바스 왕조
알 무스탄시르 2세알 하킴 1세알 무스탁피 1세알 와시크 1세
제61대
아바스 왕조
제62대
아바스 왕조
제63대
아바스 왕조
제64대
아바스 왕조
알 하킴 2세알 무타디드 1세알 무타와킬 1세알 무스타심
제63대2
아바스 왕조
제65대
아바스 왕조
제64대2
아바스 왕조
제63대3
아바스 왕조
알 무타와킬 1세알 와시크 2세알 무스타심알 무타와킬 1세
제66대
아바스 왕조
제67대
아바스 왕조
제68대
아바스 왕조
제69대
아바스 왕조
알 무스타인알 무타디드 2세알 무스탁피 2세알 카임
제70대
아바스 왕조
제71대
아바스 왕조
제72대
아바스 왕조
제7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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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스탄지드알 무타와킬 2세알 무스탐식알 무타와킬 3세
제72대2
아바스 왕조
제73대2
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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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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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알 무스탐식알 무타와킬 3세셀림 1세쉴레이만 1세
제76대
오스만 왕조
제77대
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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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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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셀림 2세무라트 3세메흐메트 3세아흐메트 1세
제80대
오스만 왕조
제81대
오스만 왕조
제80대2
오스만 왕조
제82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1세오스만 2세무스타파 1세무라트 4세
제83대
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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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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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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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이브라힘 1세메흐메트 4세쉴레이만 2세아흐메트 2세
제87대
오스만 왕조
제88대
오스만 왕조
제89대
오스만 왕조
제90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2세아흐메트 3세마흐무트 1세오스만 3세
제91대
오스만 왕조
제92대
오스만 왕조
제93대
오스만 왕조
제94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3세압뒬하미트 1세셀림 3세무스타파 4세
제95대
오스만 왕조
제96대
오스만 왕조
제97대
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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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왕조
마흐무트 2세압뒬메지트 1세압뒬아지즈무라트 5세
제99대
오스만 왕조
제100대
오스만 왕조
제101대
오스만 왕조
제102대
오스만 왕조
압뒬하미트 2세메흐메트 5세메흐메트 6세압뒬메지트 2세
^^ 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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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이집트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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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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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제54대
알 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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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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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8대 칼리파
알 무타심
المعتصم
파일:Byzantine_emissaries_to_the_Caliph.jpg
이름아부 이스하크 무함마드 이븐 하룬 알 라시드
أبو إسحاق محمد بن هارون الرشيد
출생796년 10월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사망842년 1월 5일 (향년 45세)
아바스 왕조 사마라
재위 기간아바스 칼리파
833년 8월 9일 ~ 842년 1월 5일 (9년)
전임자알 마문
후임자알 와시크
부모아버지 : 하룬 알 라시드
어머니 : 마리다 빈 샤비브
종교이슬람 수니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아바스 왕조 8대 칼리파.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으며 튀르크인을 우대했다.


2. 생애[편집]


796년 10월 바그다드에서 아바스 왕조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튀르크계 여노예였던 마리드 빈트 샤비브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815~816년 메카 순례 행렬을 이끌었으며, 817년 카와리즈파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 일부를 지휘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한 전투에서 튀르크 장병 한 명이 그를 향해 "저를 주목해주십시오!"라고 외치고는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카와즈리파 장병들을 쓸어버렸다. 그는 이에 큰 감명을 받고 그 남자에게 아시나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한다. 아부 자파르 아시나스는 그의 경호대장이자 심복으로서 활약했다.

829~830년, 그는 이집트를 평정하고 반란군 수괴들을 처형했다. 이후 알 마문의 동로마 원정에 참여해 30개의 요새 함락에 공헌했다. 그러던 833년 9월 7일, 알 마문이 타르수스 인근에서 사망했다. 알 마문은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이며 군대와 민중에게 인기가 많았던 알 아바스가 아닌 이복 동생인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즉시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기 위해 티아나에 집결했던 군대를 바그다드로 철수시켰다. 또한 이샤크 이븐 이브라힘 이븐 무사를 하마단 인근에서 발발한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샤크는 임무를 무사히 수행했고, 반란군 잔여병은 동로마 제국으로 도피했다. 한편, 알 아바스는 그에게 기꺼이 충성 선서를 했다. 병사들은 알 아바스를 칼리파로 세우려 했지만, 아바스는 "이 무의미한 헌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이미 외삼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라며 거부했다.

834~835년,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이 쿠라산에서 시아파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토벌대에게 패한 뒤 생포되어 바그다드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카심은 곧 탈옥했지만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가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 하류에 거주하던 주트 부족을 물리쳤다. 우제이프는 이듬해에 그들을 배에 실은 채 그 앞에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선보였다. 주트 부족은 동로마 제국 국경으로 보내져 최전선에서 적군과 맞서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까다로운 반란이 있었으니, 바로 이란과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봉기한 바박 호람딘이었다. 바박은 816/817년에 봉기한 이래 20여 년간 토벌대를 모조리 물리치고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등 아바스 왕조의 골치거리가 되었다. 그는 알 아프신 카이다르 이븐 카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 아프신은 신중하면서도 꾸준한 공세를 벌인 끝에 837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바박은 체포된 뒤 838년 사마라로 끌려가 공개 처형된 후 수급이 호라산으로 보내졌다.

837년,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필로스가 7만 대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시키고 멜리테네(말라티야)를 조공 도시로 만들었다. 838년, 그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타르수스에 8만 대군을 집결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바스군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복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알 아프신과 칼리파의 부대로 나뉘었다. 알 아프신의 부대는 카파도키아로 진군했고, 칼리파의 부대는 칼라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했다.

테오필로스는 두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얀첸)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했다. 당시 동로마군에 귀순한 뒤 용맹을 떨쳤던 아르메니아 장군 테오포보스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아바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테오필로스가 말을 잃고 친위대와 함께 동분서주할 때, 병사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해버렸다. 결국 이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완패했고, 아바스군은 여세를 몰아 앙카라를 공략한 뒤 아모리움을 포위해 2주만에 함락시키고 7만에 달하는 시민 중 절반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에로 끌고 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그는 알 마문의 아들 알 아바스가 주변인들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얄 사흐르 이븐 샤히, 아므르 알 파르하나,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 아흐마드 이븐 알 할릴을 처형하고 아바스는 감옥에 갇힌 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 후 그는 아바스의 반역에 대거 연루되었던 아랍인 장성들을 불신하고, 어머니의 동족인 튀르크 출신 장성들을 우대했다. 특히 4,000명의 노예 튀르크인들을 소집하여 길만(ghilman)이라는 이름의 호위 부대를 결성해 자신을 경호하게 했다. 또한 반 튀르크 정서가 팽배한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수도를 옮겼다. 사마라는 892년 알 무타디드가 바그다드로 복귀할 때까지 아바스 왕조의 수도로 활동했다.

한편, 이전 칼리파 알 마문의 치세 때 호라산을 영지로 삼았던 타히르 왕조는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사마르칸트, 파르하나, 헤라트의 총독 직을 확보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마자르 이븐 카린이 838년 압둘라 이븐 타히르 총독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피 일대의 세금을 타히르 대신 알 무타심의 대리인에게 직접 납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자르는 사리야인들을 투옥하고 아물 성벽을 허물었으며, 타미스를 요새화하고 유르잔 일대의 치안을 어지럽혔다. 압둘라는 이를 토벌하고자 하이얀 이븐 자발라를 파견했다. 하이얀은 마자르의 부관 카린 이븐 샤흐리야르를 회유해 마자르를 배신하게 했다. 여기에 사리야 사람들이 마자르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하이얀은 사리야에 도착하여 합세한 뒤 와다후르무즈 산맥으로 진격하여 마자르의 재산 일부를 확보했다. 결국 세력을 잃은 마자르는 곧 사로잡힌 뒤 사마라로 후송되었다.

이때 하이얀은 다지몬 전투의 영웅 알 아프신이 마자르에게 보낸 서신을 확보하여 사마라에 보냈다. 한편, 알 아프신은 칼리파의 결혼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알 아프신의 친척 민카주르가 아다르바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생포되었다. 이 일로 의심을 받던 그는 하이얀의 서신이 도착하자 칼리파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심문받았다. 마자르는 아프신이 바박을 토벌할 때 바박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자신의 영지인 우슈루사나로 옮겼으며, 바박의 조로아스터교 신앙서들을 번역하여 가지고 다녔다고 진술했다. 아프신은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칼리파는 묵살하고 특별 감옥에 수감시킨 뒤 841년 5월 또는 6월에 처형했다.

그는 일생 내내 전쟁을 치렀고 하룬 알 라시드와 알 마문에 비해 학문에 대한 열의는 없었다. 그렇지만 학자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지속했고, 바그다드는 비록 수도 지위를 상실했지만 예술과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지적 풍토에서 번역가, 가정교사 등으로 활동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활동한 학자 중에는 천문학자 하바시 알하시브 알마르와지, 아흐마드 알 파르가니, 박물학자 알 자히즈, 그리고 저명한 아랍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칼리파에게 첫번째 철학서를 바친 알 킨디가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이자 의사이며 번역가인 후냐인 이븐 이사크도 이 시기에 활동했고, 후냐인을 후원한 네스토리우스교 의사 의사 살마웨이 이븐 부난은 알무타심의 궁정 의사가 되었다. 살마웨이의 라이벌이며 역시 네스토리우스교 의사인 이븐 마사웨이는 해부학 저서를 칼리파에게 바쳤다.

한편, 그는 알 마문 이래로 이슬람 신학의 주요 교리가 된 무타잘리 학파를 "쿠란의 영원불멸을 믿지 않는 이단"이라며 받아들이길 거부한 아흐마드 빈 한발을 체포하고 무타잘리 학파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고, 한발이 끝까지 거부하자 감옥에 투옥시켰다. 그러나 한발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훗날 한발리파를 결성했다.

841년 10월 21일, 알 무타심은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였던 살마웨이 이븐 부난은 작년에 사망했고, 새로운 의사는 정상적인 치료를 따르지 않아 병이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842년 1월 5일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아들 알 와시크에게 칼리파 직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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